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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韓醫學)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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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4-09-19 15:46 조회 128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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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韓醫學)의 역사

 

  우리 전통 한의학은 중국의 의학을 도입하여 반만년의 역사와 궤를 같이하면서 우리 민족의 실정에 맞게 끊임없이 보완·발전되어왔다.

  삼국시대에는 중국 한나라의 의학이 수입되어 그때까지 단편적으로 전래되던 의학이 체계화된 의학 속에 흡수되었다. 고구려에는 궁중의 의료를 담당하는 시의(侍醫)가 있었으며, 백제는 내관(內官) 중에 약부(藥部)라는 전문의료기관이 있었고, 교육을 담당했던 의박사(醫博士)와 약을 다루는 채약사(採藥師), 정신의료를 담당했던 주금사(呪禁師)가 있었다.

  통일신라는 전문의료인의 양성을 도모하고 약전(藥典이라는 의료행정기관과 의학(醫學)이라는 의학교육기관을 설치했다. 당시 의학의 교과과정을 보면, 중국의학을 대표하는 본초경(本草經갑을경(甲乙經황제내경(黃帝內經난경(難經) 등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러한 책들은 조선 중기 동의보감 저술에 대단한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현재 동양의학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기본서적들이다.

  고려는 의학교육을 실시했을 뿐만 아니라, 과거제도를 실시하며 의업을 별도 과목으로 운용하였으며,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을 발간하면서 향약이라는 고유의 개념이 확립되었다.

  조선은 교육기관으로는 중앙 및 각 도에 의학원(醫學院)을 설치하였고, 의료기관으로는 중앙에 내약방·전의감·혜민국·동서대비원·제생원 등이 있었고, 지방에는 의원이 있었다. 이중 전의감은 주로 왕실의 의료와 아울러 의학교육을 담당했으며, 혜민국은 일반 민중의 치료를, 동서대비원은 전염병과 구호사업을, 제생원은 약재의 채취와 의서의 수집, 민중의 의료를 각각 담당했다. 이외에 부녀자의 진료를 위한 의녀(醫女)를 양성하였다.

  이렇듯 완전한 제도를 갖춘 조선은 고려의 성과를 바탕으로 향약연구에 심혈을 쏟아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을 초기에 완성했다. 향약집성방은 모든 병을 망라하여 임상서로서 완전함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나는 약재로 대체했고, 처방에 있어서도 우리나라에서 만든 경험방을 많이 수록하고 있다.

  세종 때 중국의 모든 방서를 정리한 작업을 벌이기 시작해 성종대에 이르러 완성한 의방유취(醫方類聚)는 당시 중국에서도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의방의 총서이다.

조선중기 선조대 1600년대 초에 허준의 동의보감 간행으로 중국의학에 대한 우리 의학의 독자성을 가진 동의학이 탄생하게 된다. 동의보감은 질병의 치료뿐만 아니라 예방에도 큰 비중을 두어 예방의 구체적인 방법인 도가(道家)의 양생술을 수록하고 있다.

  조선후기 1800년대 말에 이르러 이제마의 동의수세보원으로 세계의학 사상 초유의 '사상체질의학'을 주창하여 동의학의 진가를 한층 높였다. 이 책은 질병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지 않고 인체의 개별적인 체질의 특성에 따라 해석한 새로운 차원의 질병관을 담고 있다. 즉 인체를 그 체질적 특성에 따라 사상인(태음인·태양인·소음인·소양인)으로 나누고, 체질별로 질병의 원인·증상·치료방법을 각기 다르게 논한 의학이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서양의학의 유입으로 동양의학과 양대의맥(兩大醫脈)을 형성하면서 침체기에 들어간 한의학은 일제의 침략과 민족문화말살정책으로 수난에 직면하게 되고, 일제강점기 겨우 명맥을 유지하던 한의학은 19458·15 해방과 함께 새로운 도약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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